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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그란벨름은 왜 망했는가?

Mariabronn 2019. 12. 6. 21:08

[덕후지수 : ★★★★★] 스포일러 있으니 조심하기 바랍니다.

 

 


 

 

 어느새부터인가 내 취향이 좀 마이너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건 덕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 높은 점수를 준다. 남들이 써놓은 이야기를 모션으로 그려내는 것이 다가 아니라, 주어진 것 없이 이야기부터 만들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아이돌 종류의 애니메이션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기승전 노래로 끝나서 이야기가 엉성하며, 예쁜 캐릭터 상품을 파는 것이 목표라는 제작진의 의도가 너무 눈에 보여서이다.

 

 이렇다보니 나는 엄청 재밌게 봤는데 정작 다른 사람들은 아예 알지도 못하거나 재미없다는 반응을 자주 봐 왔다. 올해 3분기 애니메이션이었던 그란벨름 역시 그런 종류였다. 오래간만에 매 화가 기대되는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일본에서는 예약자가 하도 적어서 BD 발매가 연기될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안타까운 나머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란벨름은 마법소녀 메카 애니메이션이다. 이 애니메이션을 안 봤다 하더라도 마법소녀에 메카가 합쳐진 걸 보면, 마법소녀끼리 하하호호하는 판타지 일상물이 아니라는 감이 올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어두운 마법소녀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면서 왜 그란벨름이 망했는지 알아보려 한다. 비교하고자 하는 다른 애니메이션 두 편은 다음과 같다.

 

 

순서대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마마마), 위크로스 시리즈, 그란벨름

 

 

 

 세 작품 모두의 공통점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고, 마법소녀물이라는 점이다. 위크로스 시리즈를 마법소녀물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고민이 좀 되지만, 소녀들이 비현실적인 소망을 가지고 싸우니까 마법소녀물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모두가 각자의 소원을 가지고 싸운다는 점 역시 같다.

 

 

 두 작품씩 묶어서 보면 마마마와 위크로스 시리즈의 공통점은 힘이 소진되면 마법소녀 자체가 위험해진다는 점이다. 마마마에서는 마법소녀가 마녀로 되어 버리고, 위크로스 시리즈에서는 상처를 입거나 기억을 전부 잃어버린다.

 

 마마마와 그란벨름은 포스터부터 보다시피 주인공이 핑크머리고 조력자가 흑발이라는 점부터 유사하다. 또한 마법소녀들의 소망을 정직하게 이루어주지만 거기에 대가가 달려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결국은 새드엔딩이 났는데 이 점도 상당히 비슷하다.

 

 위크로스 시리즈와 그란벨름은 마법소녀들과 대신해서 싸워주는 존재가 있다. 위크로스에서는 루리그라는 조력자가 있다. 그란벨름은 장르 설명에 있듯이 마법소녀 별로 메카닉이 있고, 나중에는 정령까지 등장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란벨름은 대차게 망한 한편 나머지 두 애니메이션은 엄청 흥행했다. 마마마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후속편을 기다리는 명작이 되었고, 위크로스 시리즈는 TVA만 3시즌을 방영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렇다면 제목으로 돌아와서 왜 그란벨름만 망했는가? 나무위키에서는 그란벨름이 흥행에 실패한 요인으로 새드 엔딩을 지적하고 있지만, 마마마가 흥행한 걸 보면 새드 엔딩이 이유는 아닌 것 같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야기의 짜임새가 아주 큰 요소로 작용하는데 무리한 해피 엔딩은 이야기의 개연성을 망가뜨린다. 그란벨름의 경우에는 그동안 나온 떡밥이나 이야기 전개 면에서 새드 엔딩이 마무리로 손색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란벨름이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첫째로 자극적인 맛이 덜해서가 아닐까 싶다. 마마마의 경우에는 어두운 마법소녀물의 선구자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림체가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전개도 충격적이었고 결말도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인간관계도 꼬여 있었다. 반면 그란벨름은 마마마로 단련된 시청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뭐 하나 잘난 구석이 없었다. 인간관계도 평범했고 이야기 전개는 이미 맛봤던 매콤한 맛이었다.

 

 

 

알드노아 제로의 슬레이프니르

 

 둘째로 외부적으로 기댈 구석이 없었다. 위크로스 시리즈의 경우에는 애초에 TCG를 내면서 거기에 이야기를 입혀 애니메이션을 만든 것이라 외적으로 흥미를 유발할 요소가 있었다. 하지만 그란벨름의 경우에는 판매할 상품이 없었다. 작중 등장하는 기체들 역시 구슬동자 느낌이라 피규어로 팔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란벨름 제작진들은 알드노아 제로가 스토리 전개로서는 혹평을 받았음에도 작중 기체였던 슬레이프니르가 불티나게 팔렸다는 사실을 참고해야 했다.

 

 


 

 

 금방 쓸 줄 알았는데 쓰다보니 한 시간이나 걸렸다. 인간은 이성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성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생각해보면 감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성이 일을 하는 경우가 잦다. 결국 위에서 쓴 그란벨름의 흥행 부진 이유는 단순한 변명에 불과한 게 아닐까. 그란벨름은 그냥 재미가 없어서 망한 것이었고, 내가 힙스터였기 때문에 그란벨름을 재밌다고 느낀 것일 수도 있다. 2018년 4분기 애니메이션 그리드맨은 어릴 때 보던 로봇 만화영화의 왕도를 자극적 요소의 가감이 없이 그대로 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마마도 받았던 일본 SF 문학상인 성운상을 수상한 걸 보면, 지금까지 써내려 온 이 글은 그냥 한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일본 커뮤니티에서 2019년 애니메이션 중 재평가되어야 할 애니 1위에 뽑혔다고 한다. (링크) 그나마 그란벨름의 매력을 알아준 사람들이 있어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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