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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M 운동에 반대한다

Mariabronn 2020. 7. 5. 23:35

 그레타 툰베리는 2019년 UN에서 열린 기후 행동 정상회의에서 연설해서 환경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이 소녀가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기후 변화를 막고 환경을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환경 운동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일까?

 

 서구 열강들은 18세기 산업혁명 이래로 환경을 파괴한 댓가로 경제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그 나라들은 지금까지도 선진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후발 주자인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의 개발도상국들이 발전하려고 하니까 이제 와서 환경 보호를 외치는 것은 비겁하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레타 툰베리의 발언 자체는 국제정치적 계산이 없는 순수한 발언일 수 있겠지만, 그 발언이 널리 퍼지는 데는 모종의 다른 이유가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그레타 툰베리는 스웨덴 사람인데, 스웨덴에서는 과거 다이너마이트를 팔았던 돈으로 매년 전세계 학자들에게 상을 주고 있다.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익적인 모토를 부르짖는 경우는 오늘날의 일이 아니다. 1918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두고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일제 억압 하에 있던 한국 사람들은 이를 근거로 하여 삼일 운동을 했지만,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처리하기 위한 원칙에 불과했다. 1차대전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적용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래로 전세계적으로 BLM 운동이 한창이다. 그런데 나는 이게 도저히 인종차별반대운동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첫째로, 슬로건부터가 수상하다. BLM은 Black Lives Matter이다. 해석하자면 흑인의 목숨은 소중하다는 것인데, 왜 인종차별 반대라면서 소중하다는 대상의 주체를 흑인으로 한정하고 있는가? 정말 인종차별을 반대하려면 All lives matter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공익적인 모토를 부르짖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렇게 보인다. 흑인 집단만을 위해 인종차별 반대라는 공익적 슬로건을 내거는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동료가 한 명이라도 소중한 때에, LA에서 흑인이 아시아인을 폭행하는 사건 같은 게 일어날 리가 없다. 

 

 

 

 둘째로, 평등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두 집단 간의 파워 게임이다. 흑인 차별이 멈춰진다고 해서 다른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멈춰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흑인 차별 금지를 정책이나 법으로 만든다면 소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이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이는 심지어 선례도 있는데, 바로 미국의 적극적 조치(Affirmative Action)이다.

 

 적극적 조치는 1960년대 흑인 인권 운동의 영향을 받아 케네디 대통령이 만든 제도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오늘날 아시아 인종들의 아이비리그 입학을 방해하고 있다. 인종 차별은 그대로 존재하는데, 흑인은 이제 차별하지 못하니 풍선 효과처럼 그 대상이 아시아 인종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번에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조지 플로이드 사태에 대해 2020년 대선에서 당선되는 대통령이 흑인들을 위한 법을 만들면, 아마 미국 내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은 더 심해질 것이다.

 

 

출처 : 올리버쌤(youtu.be/PPtQu9wmcVU)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멈추게 되면 아시아인들에 대한 처우도 개선되는 게 아니냐고 반론을 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평등이란 것은 '두 집단'간의 파워 게임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각국 법원 앞에 흔히 있는 유스티티아 여신상이 들고 있는 천칭은 두 물건 간 무게의 균형을 잡는 도구이다. 발이 세 개 달린 천칭을 본 적이 있는가? 신도 아닌 인간이, 심지어 물건도 아닌 여러 집단의 균형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또다른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저울질을 여러 번 해서 균형을 잡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나 흑인에 대한 차별은 2020년에 생겨난 게 아니다. 적극적 조치에서 봤듯이 흑인 차별 문제는 1960년대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해결을 하지 못하고 있다. 두 집단 간 균형을 잡는 데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저울질을 여러 번 해서 균형을 잡는다는 건 정말 이상 속에 불과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이방인에 대한 혐오, 제노포비아는 동물에게서도 관찰되는 본능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를 해결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요즘 인터넷에서는 아시아인들이 온라인 상에서 BLM을 외치며 인종차별 폐지를 주장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당신들은 흑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BLM을 외친다고 인종 간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다. 흑인과 백인 간의 타협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시아인을 보고 눈을 쭉 찢거나 yellow monkey라고 불리는 등 인종 차별을 받기 싫다면 우리가 외쳐야 할 것은 BLM이 아니라 ALM, Asian Lives Matter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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