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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날씨의 아이 리뷰

Mariabronn 2020. 8. 1. 16:13

이 글에는 영화 '날씨의 아이' 스포일러가 들어 있습니다.


 이야기를 음식에 빗댈 수 있을까. 이야기의 소재는 음식의 주 재료가 되고, 장르는 음식의 조리 방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체나 작화, 연출 등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조미료가 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느끼는 흥미나 몰입도는 음식의 맛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소년이 소녀를 만나는 소재, Boy meets girl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자주 쓰인 음식 재료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신화인 큐피드와 프시케의 이야기도, 아프로디테가 큐피드에게 프시케를 가장 못생긴 남자와 결혼하라고 시켜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년소녀의 만남은 수없이 많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에서 고아 핍은 에스텔러와의 만남으로 인해 신분 상승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된다. 김유정의 '동백꽃'은 시골 아이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소년과 소녀의 만남을 이용했다.

 반면 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에서는 소년소녀의 만남을 한국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 소재로 이용했다.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역시 톰과 베키의 모험을 당시 미국의 시대상을 그려내기 위해 사용했다. 같은 소재지만 이용하는 방법은 천차만별이다. 인기있고 오래 사용한 소재인만큼, 활용하는 방법 역시 다양해진 것이다.

 

 방법이 다양해진 건 서브컬쳐에서도 마찬가지다. 만화 '악의 꽃'에서는 사춘기 아이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했다. '레이브'에서는 장대한 모험의 근원이 되고, '맨발의 메테오라이트'에서는 주인공이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동력이 된다. 당연히 카레카노 같은 정통 순정만화도 있다.

 


 

 그런데 일본에는 한 음식 소재와 같은 조리방법만을 고수하는 특이한 이야기 쉐프가 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날씨의 아이' 감독인 신카이 마코토이다. 이 사람이 만든 대부분의 작품들은 소년 소녀가 만나는 로맨스 애니메이션이다. 그것도 그냥 로맨스가 아니고, 운석이나 폭우 등 일본의 운명이 걸린 큼직한 일과 엮여 있다. 자극적인 소재에 로맨스를 섞고 그림도 예쁘니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게 아닌가 싶다.

 

세카이계 대표 만화 나루타루

 

 '날씨의 아이'에서는 남주 호다카와 여주 히나가 일본의 장마를 멈추기 위해 분투한다. 이렇게 등장인물 두 명만이 세계의 존망에 관여하는 장르를 세카이 계통이라고 부르는데, 등장인물이 적은 만큼 인물의 배경과 이야기의 개연성이 상당히 중요해진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실망했던 첫째 이유는 이 애니가 세카이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의 배경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호다카가 가출해 도쿄로 오게 된 배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미성년자인 히나는 남동생과 둘이서만 살고 있는데, 관리해주는 가족이 아무도 없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감독이 억지로 만든 새장 속에 캐릭터들이 갇혀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경찰 추격 씬을 볼 때 박진감이나 감동이 전혀 안 느껴졌던 이유도 등장인물들이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걸 은연중에 깨달아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있다고는 하지만,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봐야 하는 영화를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째 이유는 서사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선 히나는 피안에 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는데, 비 그치는 능력은 왜인지 사라졌다. 히나가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날씨가 맑아지는 연출을 통해 '히나=산제물' 이라는 생각을 관객들에게 심어줬다면, 그 이후에 히나가 돌아왔을 때 능력이 없어졋던 이유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하고 넘어갔어야 했다.

 다음으로 케이스케가 호다카에게 했던 말 중 다들 인상깊게 봤을 "어른이 되어라 소년" 부분 역시 전혀 설득력이 없다. 딸 모카 이야기를 하면서 "어른이 되면 우선순위를 바꾸기 힘들다"라고 하더니, 일편단심 우선순위가 히나였던 호다카에게 "어른이 되어라"라고 하면 뭐 어쩌라는 건지.

 

 

 마지막으로는 뜬금없었던 결말을 들 수 있다. "세상은 원래부터 미쳐있었다"라니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실격이다. 결국 장마가 계속된다는 건 하나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영화 내내 벌인 소동이 뭐였는지 김이 팍 샌다. 세카이 계는 초반부에 주인공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세상이 멸망하는 이야기 전개가 들어간다. 능력 사용으로 인해 세상이 구해지는 대신 주인공은 처참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결말 부분에서는 기적적으로 해피엔딩이 나느냐, 아니면 새드엔딩으로 가느냐의 차이가 난다. 그런데 '날씨의 아이'에서는 능력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없었고, 능력으로 세상이 구해지지도 않았다. 클리셰 비틀기라고 선해해도, 보는 사람의 의문점만 일으킨다는 점에서 전혀 참신하지 않은 전개다.

 호다카의 무책임한 태도 역시 감점 요소다. 무책임하게 "세상은 미쳤으니 도쿄에 홍수난 건 내 알 바 아냐"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보다, 적어도 날씨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넣었으면 이 정도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식 이야기로 글의 시작을 했으니, 글 마무리도 음식으로 해야겠다. 김밥천국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김밥을 판다. 그런데 잘 보면 이름이 다른 김밥이라도 재료 한두가지만 다르고 나머지는 전부 같다. 신카이 마코토는 애니메이션계의 김밥 천국 주방장이 아닌가 싶다. Boy meet girl이라는 똑같은 소재에 비슷한 전개. 애니를 보고 실망하긴 했지만, 애초에 김밥천국에서 상품이 아닌 작품이 나올 거라 기대한 나의 잘못이다. 다만 하나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작화라는 조미료에 속아 신카이 마코토의 음식들을 미슐랭 급이라고 착각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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